2022. 7. 31. 03:03ㆍMelody & Lyrics
너의 모든 걸 두 눈에 담고 있었죠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
서태지 - 소격동 (2014)
예술의 매력은 애매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태지의 소격동은 그러한 측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노래다. 그러나 애매함 자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고, 누구라도 도입무 3초만 들어도 이 노래에 반하지 않을까 싶다. 이 곡은 굉장한 몰입감을 갖고 있어서 듣다보면 옛날에 살던 고향이 생각나며 감정 이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문학이든 영상이든 음악이든 모든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해석이 따라붙게 되는데, 해석 과정이 특히 즐거우려면 앞서 언급한 애매함이 많아야 한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게, 애매하지 않고 확실해버리면 수용자가 해석을 할 필요가 없지. 서태지의 소격동은 애매함의 요소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는데, ① 소격동의 의미, ② 가사 내용, 그리고 ③ 뮤직비디오와 ④ 서태지의 인터뷰다.
그렇담 소격동은 어디냐. 아이러니하게도 소격동은 실제 동네 자체부터 굉장히 애매하다.(←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일단 위치는 경복궁 오른쪽 길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고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대각선길 초입까지로, 인근에 있는 삼청동, 가회동(북촌)보다 인지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종로구에 속한 동답게 규모도 굉장히 작은데, 지도로 보면 국립현대미술관밖에 없을 것 같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엔 미술관이랑 삼청동 사이가 꽤나 번화한 거리다. 결정적으로 나는 서태지 노래 때문에 소격동이 어딘지 찾아봤고, 나는 평소 꽤 좋아하고 자주다니던 이 동네 이름을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됐다. 서태지가 아니었음 쭉 몰랐을 이름이라는 거다.
방금은 내가 소격동에 갖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장난섞인 인상일 뿐이고, 서태지의 노래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과거 소격동에 군 정보기관이었던 기무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지금 소격동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옛날엔 기무사 자리였다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이 감상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너무 좋은 것이다. 특히 (나도 찾아보다가 알게 된거지만) 여느 국가 권력기관이 그렇듯 기무사 역시 군사정권 당시 '녹화사업'이라고 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고, 그것을 지금 소격동사건이라고 부른다니 소격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정치적이지 않게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서태지는 예전부터 사회 참여적인 성향이 많았기 때문에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가수다.
그렇다고 이 노래를 제목부터 정치적인 메시지를 암시하는 노래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엔,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지금은 변했다는 전반적인 가사 내용이 좀 걸린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서태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소격동 주변이다.
노래의 배경, 가사 내용까지만 생각해봐도 이 노래는 [A]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냥 [B]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곡인 거 같기도 하다. 이미 충분한 해석의 여지, 애매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영상이 시작하자마자 울리는 사이렌 소리, 교련복을 입고 있는 남주의 모습 등은 A의 비중이 급격하게 증가시킨다. 그게 이 노래가 발표됐을 당시 꽤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A라고 결론내리기엔, 당시 JTBC뉴스룸에 출연한 서태지는 노래와 뮤비를 철저하게 구분짓고 있다.
[앵커] 소격동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제 각각 다른 버전의 뮤직비디오도 물론 화제가 됐지만. 소격동이라는 곳 자체가 옛날에 기무사가 있던 자리기도 하고 또 가사 내용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일정부분 살짝살짝 비춰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어떤 정치사회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 예를 들면 녹화사업이라는 것도 나온다는 말이죠.
[서태지] 뮤직비디오에.
[앵커] 녹화사업이라는 건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 문제가 있다고 정부에서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일찌감치 군대로 보내버리는 그게 녹화사업이었단 말이죠. 혹시 그런 것들을 다 이렇게 염두에 두고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띄워서 하신 건가요?
[서태지] 아니에요. 실제로 노래를 만들 때는 정치쪽은 전혀 아니었고요, 사회적인. 예를 들면 실제로 이 노래는 제 어렸을 때 예쁜 한옥마을에 대한 추억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 같은 정도만을 표현했어요. 그런데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는 저는 정말 그 예쁜 마을에 살았지만 실제로 제 마을에서 이렇게 쳐다보면 보안사가 있었고 민방위 할 때만 해도 정말 탱크가 지나가는 그런 동네였어요. 검문검색도 많이 했고. 80년대의 서슬퍼런 시대를 설명하지 않고는 이 소격동이라는 노래를 표현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그런 약간 이야기들이 계속 들어갔죠, 뮤직비디오에. 그 정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노래는 정말 예쁜 마을에 대한 추억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여러 애매한 장치들이 곡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 아닐까. A든 B든, 감상하는 사람들이 각자 선호하는 해석에 따라 즐길 수 있는 것 자체가 최고의 예술적 셋팅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왕 말한 거 좀 더 뇌절하자면, 이 노래는 서태지 버전과 아이유 버전이 있는데 보컬의 차이로 인해 두 노래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그래서 이 노래는 서태지 버전의 노래, 아이유 버전의 노래, 서태지 버전의 뮤비, 아이유 버전의 뮤비, 총 4개의 서로 다른 작품을 제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시 처음 인용한 가사로 돌아와서, 내가 이 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러한 모든 애매함이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라 의도적인 설정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 A와 B 어느쪽으로 해석해도 자연스럽고 또 어색한 이 애매한 문장이 곡과 뮤비를 연결하는 통로로 작용하고 있다.
※ 개인적으로 아이유ver.보다 서태지ver.을 더 좋아한다. 참고로 서태지ver.을 '원곡'이라고 할 순 없다. 서태지는 '소격동 프로젝트'라고 해서 애초에 두 ver.을 의도했다.
※ 서태지ver.을 더 좋아한다 뿐, 아이유ver.을 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당시에 아무리 아이유ver.이 선공개였다고 쳐도, 서태지ver.보다 조회수가 10배 이상 차이나는 건 좀 많이 신기하다.
+ 본문에서 언급한, 서태지의 JTBC 뉴스룸 인터뷰 출연영상
+ 인상깊은 평론 첨부 :) 아래 글에 언급된, 소격동과 같은 앨범의 크리스말로윈도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663
‘실종’에 대한 영상 텍스트 ‘소격동’ 뮤직비디오 - 미디어오늘
서태지의 ‘소격동’은 음악만으로가 아니라 뮤직비디오까지, 그것도 아이유가 부르는 버전과 서태지가 부르는 버전을 같이 보면서 들을 때 더 많이, 더 깊이 느껴지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곡이
www.mediatoday.co.kr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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